아름다움이 눈부신 이유

      최형순_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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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그림 앞에서는 눈시울을 붉히기 쉽다. 왜일까. 아름답지 않아서가 아니다. 너무나 눈부시게 아름답기 때문이다. 예술이 감동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이 미술이야말로 그걸 제대로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작가 이장우는 자폐장애를 지니고 있다. 헤쳐 나갈 세상이 그에게는 너무 무겁다. 온갖 두려움 속에서 자신을 추스르기도 힘든 그가 오히려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미술로 보여주고 있다. 믿을 수 없는 표현 기법을 맘껏 구사하면서 말이다. 거친 바탕에 미세하거나 큼직한 형태에서도 머뭇거리지 않는 필치로 이미지를 살려내고 있다. 풍경 속에는 모든 것이 있다. 태백과 인제 원대리의 자작나무, 강릉 초당의 소나무나 단경골의 무성한 숲이 우거져 있는 풍경과 색은 더없는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다. 풍경이 그저 풍경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묵호 등대마을, 강릉 안목 커피거리, 집으로 가는 길 석양 양쪽에 우뚝 서있는 아파트 숲은 오늘 우리 삶의 얘기들이 아닐 수 없다.

      빠른 필치 속에 자연의 인상을 담아내는 인상파 작가들이 있었다. 필력을 중시하는 동양적 전통이 있는 이곳에서 그들에게 그렇게 열광했던 이유는 분명하다. 작가의 선이 살아있는 ‘사진이 아닌’ 그림은 그 사랑의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인상파의 시작이자 모든 것이라 할 클로드 모네와 가장 사랑하는 작가 빈센트 반 고흐를 이장우도 좋아했다. 그게 그의 그림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활발한 유화 물감의 붓 선과 나이프로 누른 면과 두터운 덩어리로 살아있는 표면, 게다가 실상에 가까운 이미지와 색으로 만든 그림이다. 모네와 고흐 미술 표현의 핵심이 한 자리에 모인 듯하다.
      어떤 사람들도 가질 수 없는 집중력과 의지의 소산이라면, 이 놀라운 결과는 주목 대상이 되어야 한다. 푸코(M. Foucault)로부터 21세기를 주도할 사상가로 불렸던 들뢰즈(J. Deleuze)가, 교육된 기교를 버리고 원래의 신체능력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한 것이 이런 이유에서였다. 정해진 것을 배우느라 인간이 할 수 있는 원래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안타까운 일도 없으니까 말이다. 이장우의 그림은 선 쓰는 법과 소묘와 색채학과 원근법과 같은 세련된 교육체계로 만들어진 미술이 아니다. 그걸 다 거쳐서 만들어진 그림이지만 어느 하나가 빠진 듯 어색하고 성에 차지 않는 그런 종류의 그림이 아니다. 대신 인간능력의 최대치, 감각과 감성으로 만드는 놀라운 완성도에 바로 가 버린 셈이다. 어떤 교육도 뛰어넘는 능력을 보여준 것이 아닐 수가 없다.

      이장우의 그림 이야기는 그의 것만도 아니다. 그의 가족 이야기이기도 하다. 작가가 천재적인 재능으로 화려하게 화단에 진출하게 하려는 노력이 아니었다. 그가 어둠 속에 갇혀있지 않고 그저 세상과 소통하길 바랐던 것뿐이다. 이해되지 못하는 환경에서 조금이라도 나은 성장을 위해 한동안 미국 거주도 했을 만큼 절박했던 그들이었다.

      거기서 그림은 그의 표현을 돕는 도구였다. ‘예술을 위한 예술’처럼 위대한 예술이 처음부터 목표가 아니었다. 이는 유용성과 쓸모가 예술의 진정한 역할임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미술은 작가 이장우가 쓸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무기였다. 세상으로 나아가는 통로이자 힘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