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우 작가론
김현주_독립큐레이터
본문
누가 질서를 말하는가. 또 누가 법을 거론하는가. 정치철학자 칼 슈미트는 노모스(nomos), 즉 “법은 법 자체의 외부에 위치한다”고 주권자의 역설을 피력하였다. 예외적 상태, 배제된 사례를 통해 질서가 구성되며, 따라서 우리가 법과 질서에서 벗어났다고 간주하는 것이 오히려 법과 질서와 관계하면서 법의 효력을 발휘하게 만든다. 이장우 작가론을 위해 나는 어떤 위치에서 그와 관계해야 하는가 고민하며 내린 첫 번째 입장은 이 벗어남, 예외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한다.
나는 이장우에게 붙는 자폐증(autism spectrum disorder)이란 진단이 비록 병리학적 효력을 가질지언정 이장우 ‘작가’에게 이 수사(rhetoric)는 말 그대로의 레토릭, 허사(虛辭) 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따라서 나는 하나의 작가적 삶과 내가 마주했던 여러 작가적 삶들 사이의 차이를 이장우에게 소급해 작가를 짐작하여 써내려가지 않고 내 눈의 감응과 미 적 분별에 입각해서 그가 일군 작품의 진폭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그를 향한 수식에서 완연히 자유롭기는 힘들더라도 한정된 틀에서 머물지 않고 바라보기를 시도한다. 그가 지닌 재능 혹은 그가 지닌 특수성에 대한 일련의 반응에 대해, 그의 목소리 없이도 설 수 있는 세계를 말이다. 비록 진솔하고 경건한 목소리라고 할지라도 세상의 무수한 소리와 섞여 때론 잡음(noise)이 되기도 하는 말을 잠시 거두고 그가 쏟아내어 여기, 펼쳐진 회화의 공간에서 누구나 그러하듯 공평하게 작품과 마주하고자 한다.
Double-Disorder
첫 개인전 이래 이장우는 강원도의 산, 숲, 바다와 살아가는 동네, 거쳐가는 지역, 여행에서 마주한 풍경과 일상을 다루고 있다. 그간 그의 작품들은 자작나무, 소나무, 단풍나무 등과 같은 특정 수목에서부터 숲, 산과 같은 군락과 서식지로의 확장을 주름지듯 드러냈다. 작품에는 또한 정조가 도드라지는데 손끝 시렸을 겨울, 지열이 잔잔하게 피어오르는 봄 등의 계절감과, 지는 해가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해질녘, 태백산맥을 동서로 넘나들었을 대기가 자아내는 구름의 고저가 특히 중경과 원경에서 나타났다.
이 여름, 처음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봄, 그가 그린 회화를 살펴보며 눈은 점점 위로, 또 점점 그림의 안으로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개나리가 물 받아 뻗어가는 태세는 캔버스 프레임조차 버겁게 프레임이 꺾인 윗면까지 타고 올랐고 벚꽃의 흐드러짐은 캔버스라는 지지체의 평면성이 못내 아쉬워서일까 요동치듯 캔버스 앞으로 또 더 위로 포개어져 있었다. 짙푸르기 전 연둣빛 산세는 가지를 안으로 숨기고 잎을 밖으로 그 최대치까지 밀어내는 듯 보였다. 흔히 이런 관찰은 붓이나 나이프, 물감을 직접 다루는 회화 내 표현 방식으로 수렴되어 작가적 기법이라고 설명하기 마련이지만 기법이라 말하기에는 기법이란 틀이 이장우에게 협소해 보인다. 보통 숙련의 과정에는 기법 연구가 따르는데 기법 연구는 효율성을 재고하기 마련이다. 이장우에게 숙련, 처리, 효율이라는 경제성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을까 판단해 볼 때, 습(習)에서 오는 일련의 반응은 있을지라도 ‘그는 늘 새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이 생겼다. 물론 텅 빈 캔버스에서부터 시작하는 회화가 늘 새로운 과업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회화는 대체로 대결 끝에 내린 선택된 캔버스 프레임과의 잠정적 순응이자 약속이고 일련의 축적을 통해 계열을 형성한다. 이에 반해서 이장우의 작품은 쉽게 말해 풍경이라는 너른 범주나 그가 선택하는 식별 가능한 대상의 군 이외에는 질서라는 법칙을 이루는 일련의 회화에서 보이는 공통성보다는 특수성이 도드라진다.
나는 이장우에 대해서 화가의 기법 아닌, 작가로서의 선택과 발현에 주목하면서 그 근거로 그가 취하는 프레임의 특이성과 스펙트럼의 중층을 꼽는다. 스펙트럼의 중층에 대한 설 명은 잠시 미루고 그의 프레임에 대해 얘기해 보자.
미술평론가 제리 살츠는 카메라의 기계적 측면과 인간의 눈이 취하는 경험과 감정이 결부된 측면을 비교한다. 무엇보다 카메라 렌즈가 왜곡을 보정한다면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혹은 그렇지 않다. 그의 단언은 이렇다. “눈이 스캔(scan)한다면 카메라는 도려낸다(crop).” 살츠의 논의를 이장우에 대입해 볼 때 이장우는 그가 정밀하게 살피고 훑은, 즉 스캔 한 세계의 면면을 보기 좋음의 관습적 배치(composition) 대신 관례와는 다른 방식을 설정한다. 이 특징은 원경의 풍경보다 근경과 중경 사이의 세계가 캔버스에 담길 때 특징적 인데 나무보다는 나무의 특정 일부에 근접해서, 숲보다는 숲을 이루는 나무에 근접해서, 대상의 완전함이 드러나는 방식을 대체할 그만의 절개와 그만의 집요함에 따르고 있다. 이를 살츠가 거론한 카메라의 도려내기(crop)로 간주하기에는 카메라의 보정 기능이 이장우에게 답습되고 있지 않다. 물론 이장우도 작가들이 자료 조사의 과정에서 그러하듯 주위의 풍경과 대상을 카메라에 담고 이를 능숙하게 보정툴로 다룬다. 그러나 이 과정의 유무, 그 정도와 별개로 그는 카메라가 세상을 포착할 때 벌어지는 선택적 보정보다 그가 그리기로 결심한, 그 결심의 대상 전체에 높고 고른 밀도의 관심과 애정을 전면적으로 쏟는다. 바로 이 지점이 효율과 동떨어져 있는데 이를 탈숙련화라고 납작하게 말하기는 뭇 세계의 시선일 뿐이다. 회화의 통속적 판단과 관습이 자리하는 법칙의 외부에서 그는 이중 예외라는 운신의 폭을 얻는다. 진단에 의해 예외(disorder)에 놓였던 작가는 다시 한번 자신의 선택에 의해 예외(disorder)에 선다. 이 이중의 예외가 벌어지는 외연은 상이하지만 이로부터 얻은 운신의 폭이 그에게 발휘하는 힘은 값지다.
Within Spectrum
이장우의 선택과 발현의 특이점으로 보이는 작품에 드러나는 스펙트럼의 중층에 대한 단서는 바다 그림에서 촉발되었다. 회화를 감상할 때에는 작가가 설정한 적정 거리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데 대체로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로 설정하는 1.2미터에서 3.6미터 정도의 거리선을 두고 필요에 따라 더 근접하거나 더 물러서서 작품을 바라보곤 한다. 일반적으로 작가 또한 작업 과정에 화면에서 물러서서 자신의 작품을 관조하는 과정을 반복하는데 그 물러섬의 정도가 관객에게도 요구하는 적정 거리에 가깝다. 안목 해변과 경포 호수 일대를 그린 작품을 마주하면서 이장우가 설정한 거리는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화면 가까이에서 관찰한 건물의 세부를 1미터 물러나서, 또 3-4미터 물러나서 바라보면서 간취하게 되는 바는 물러섬에 따라 원경에서 얻게 되는 퍼스펙티브를 위해 형태가 와해되는 시각적 효과로의 전이가 여기서는 단순히 벌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쉽게 협상하지 않고 있다. 효율이나 효과를 위한 임의적인 처리의 위계를 부러 부리지 않는다. 바다는 바다로, 해안에 자리한 인간사의 인공물들은 그 인공의 존재만큼, 하늘은 하늘로, 풍경의 대상은 서로에게 양보 없이 자체의 세를 발휘한다. 양보는 미덕이지만 미덕보다 더 자연스러운 건 그대로 두는 것일지 모른다. 이 담백한 진실에도 불구하고 역능의 필터를 부여하여 위계가 개입된 예술은 대단히 인간적이다. 인간적이라 위대하지만 인간적이라서 자의적이다. 다시 이장우의 작품을 바라보면 추출보다 거기에 둠이 자연스럽다. 그에게 평창동은 부촌이 아니라 그가 간 곳, 그에게 롯데월드타워는 한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아닌 그가 바라볼 때 그 앞에 있던 건물이다. 스펙터클을 위한 포석이 없는 회화이기에 이장우의 작품에서 겪는 감동과 아름다움은 예술이 저 멀리 있다고 믿는 이들보다 예술이 도처하다고 믿는 이들에 가까이 있다.
이장우가 자연스러운 것은 화면의 수직적 구축이나 대상과 풍경 사이의 위계만이 아니라 눈과 대상 사이의 문제도 포함한다. 우리는 흔히 스펙트럼(spectrum)이 넓고 다양하기를 바란다. 혹은 한 지점에서의 심도가 깊기를 바란다. ‘spect’로부터 파생된 어휘가 일반적으로 ‘보기’와 연동됨을 떠올려 본다면 스펙트럼은 시각과 관점의 다양함과 유연함에 닿아 있다. 그러나 유령을 뜻하는 스펙터 (영: specter, 불: spectre)도 ‘spect’로부터 파생되어 우리가 쉽게 믿는 본 것과 보기의 행위가 환영에 근거함을 깨닫게 한다. 이토록 본다는 행위는 우리가 굳게 믿는 것과 그 믿음의 토양이 허약하다는 진실 모두를 일깨운다. 상징이 지배적이라고 믿는 세계관에 대항하여 상상의 힘을 복권하 려는 인류학자 모리스 고들리에는 20세기 대표적인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관계를 관련된 요소의 사이(between)에서 찾으려고 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관계는 사이(between) 만이 아니라 사이 내(within)에 자리한다고 주장한다. 스펙트럼이 빛의 반사와 흡수 사이의 계수로 표준화될 때 이 표준화가 수식하거나 형용하지 못하는 사이 내의 문제는 상상의 지대에서 다룰 문제이다. 이장우는 과녁을 향해 총을 드는 사수처럼 그리지 않는다. 그가 드는 붓과 나이프, 도구도 필요없이 캔버스로 향한 물감은 그리기의 목적보다 그리기의 정념과 기쁨에 봉사한다. 스펙트럼이 누군가에게는 질환 징후의 전(全)범위와 같은, 측정 범위를 말할 때 이장우는 결과적인 지표에서 벗어나 세계의 사이 내를 궁리한다.
숨 쉬는 공기, 세계를 채우는 대기, 대기의 시각적 효과인 구름과 바람, 그 많은 자연스러운 것들이 이장우에게는 자연스러워서 쉬운 것들이 아니다. 자연스럽다고 소홀히 하지 않는, 하나 하나가 그와 회화 사이 내에서 문제이고 문제적이다. 간결히 말하자면 민주적인데, 흔히 얘기하는 민주적임의 외양보다 태도에 있어서 더 그렇다.
Beyond Autism
이탈로 칼비노는 단편소설 「색깔없는 시대」에서 대기권이 형성되는 그 즈음의 세계에 대해 그린다. 단조롭지만 아늑하다고 느꼈던 세계에서는 개념이 많지 않아서 나와 너가 다름을 분리해서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대기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회색 너머의 세계에는 진홍빛 양귀비꽃, 피어나는 완두콩 색깔의 녹색 평원, 바다, 언덕, 들판 이 생기고 나와 너를 견주어 분리해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이 찬연한 세계의 이름들이 벅차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중립성이 깨져버린 부조화의 세계가 불편하여 이 세계로 나오기를 거부한다.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 짧은 소설에서 남은 자는 누구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숨은 자일까 남겨진 자일까. 그러다가 그리움이 있는 자가 한 뼘 정도는 낫겠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자폐는 어떤 세계일까 가늠해 보지만 사실 쉽게 가닿지 못한다. 그러나 그 진단에도 이장우가 닫힌 세계에 있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다. 그가 안내하는 세계가 눈앞에 있고 그가 낸 길이 여기 있는데. 그는 바람이 있고 그래서 그리는 이다. 그러므로 그는 내게 작가로 오롯하고 그에게 붙는 수식어는 오늘 참 옅고 한없이 가볍다.
나는 이장우에게 붙는 자폐증(autism spectrum disorder)이란 진단이 비록 병리학적 효력을 가질지언정 이장우 ‘작가’에게 이 수사(rhetoric)는 말 그대로의 레토릭, 허사(虛辭) 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따라서 나는 하나의 작가적 삶과 내가 마주했던 여러 작가적 삶들 사이의 차이를 이장우에게 소급해 작가를 짐작하여 써내려가지 않고 내 눈의 감응과 미 적 분별에 입각해서 그가 일군 작품의 진폭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그를 향한 수식에서 완연히 자유롭기는 힘들더라도 한정된 틀에서 머물지 않고 바라보기를 시도한다. 그가 지닌 재능 혹은 그가 지닌 특수성에 대한 일련의 반응에 대해, 그의 목소리 없이도 설 수 있는 세계를 말이다. 비록 진솔하고 경건한 목소리라고 할지라도 세상의 무수한 소리와 섞여 때론 잡음(noise)이 되기도 하는 말을 잠시 거두고 그가 쏟아내어 여기, 펼쳐진 회화의 공간에서 누구나 그러하듯 공평하게 작품과 마주하고자 한다.
Double-Disorder
첫 개인전 이래 이장우는 강원도의 산, 숲, 바다와 살아가는 동네, 거쳐가는 지역, 여행에서 마주한 풍경과 일상을 다루고 있다. 그간 그의 작품들은 자작나무, 소나무, 단풍나무 등과 같은 특정 수목에서부터 숲, 산과 같은 군락과 서식지로의 확장을 주름지듯 드러냈다. 작품에는 또한 정조가 도드라지는데 손끝 시렸을 겨울, 지열이 잔잔하게 피어오르는 봄 등의 계절감과, 지는 해가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해질녘, 태백산맥을 동서로 넘나들었을 대기가 자아내는 구름의 고저가 특히 중경과 원경에서 나타났다.
이 여름, 처음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봄, 그가 그린 회화를 살펴보며 눈은 점점 위로, 또 점점 그림의 안으로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개나리가 물 받아 뻗어가는 태세는 캔버스 프레임조차 버겁게 프레임이 꺾인 윗면까지 타고 올랐고 벚꽃의 흐드러짐은 캔버스라는 지지체의 평면성이 못내 아쉬워서일까 요동치듯 캔버스 앞으로 또 더 위로 포개어져 있었다. 짙푸르기 전 연둣빛 산세는 가지를 안으로 숨기고 잎을 밖으로 그 최대치까지 밀어내는 듯 보였다. 흔히 이런 관찰은 붓이나 나이프, 물감을 직접 다루는 회화 내 표현 방식으로 수렴되어 작가적 기법이라고 설명하기 마련이지만 기법이라 말하기에는 기법이란 틀이 이장우에게 협소해 보인다. 보통 숙련의 과정에는 기법 연구가 따르는데 기법 연구는 효율성을 재고하기 마련이다. 이장우에게 숙련, 처리, 효율이라는 경제성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을까 판단해 볼 때, 습(習)에서 오는 일련의 반응은 있을지라도 ‘그는 늘 새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이 생겼다. 물론 텅 빈 캔버스에서부터 시작하는 회화가 늘 새로운 과업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회화는 대체로 대결 끝에 내린 선택된 캔버스 프레임과의 잠정적 순응이자 약속이고 일련의 축적을 통해 계열을 형성한다. 이에 반해서 이장우의 작품은 쉽게 말해 풍경이라는 너른 범주나 그가 선택하는 식별 가능한 대상의 군 이외에는 질서라는 법칙을 이루는 일련의 회화에서 보이는 공통성보다는 특수성이 도드라진다.
나는 이장우에 대해서 화가의 기법 아닌, 작가로서의 선택과 발현에 주목하면서 그 근거로 그가 취하는 프레임의 특이성과 스펙트럼의 중층을 꼽는다. 스펙트럼의 중층에 대한 설 명은 잠시 미루고 그의 프레임에 대해 얘기해 보자.
미술평론가 제리 살츠는 카메라의 기계적 측면과 인간의 눈이 취하는 경험과 감정이 결부된 측면을 비교한다. 무엇보다 카메라 렌즈가 왜곡을 보정한다면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혹은 그렇지 않다. 그의 단언은 이렇다. “눈이 스캔(scan)한다면 카메라는 도려낸다(crop).” 살츠의 논의를 이장우에 대입해 볼 때 이장우는 그가 정밀하게 살피고 훑은, 즉 스캔 한 세계의 면면을 보기 좋음의 관습적 배치(composition) 대신 관례와는 다른 방식을 설정한다. 이 특징은 원경의 풍경보다 근경과 중경 사이의 세계가 캔버스에 담길 때 특징적 인데 나무보다는 나무의 특정 일부에 근접해서, 숲보다는 숲을 이루는 나무에 근접해서, 대상의 완전함이 드러나는 방식을 대체할 그만의 절개와 그만의 집요함에 따르고 있다. 이를 살츠가 거론한 카메라의 도려내기(crop)로 간주하기에는 카메라의 보정 기능이 이장우에게 답습되고 있지 않다. 물론 이장우도 작가들이 자료 조사의 과정에서 그러하듯 주위의 풍경과 대상을 카메라에 담고 이를 능숙하게 보정툴로 다룬다. 그러나 이 과정의 유무, 그 정도와 별개로 그는 카메라가 세상을 포착할 때 벌어지는 선택적 보정보다 그가 그리기로 결심한, 그 결심의 대상 전체에 높고 고른 밀도의 관심과 애정을 전면적으로 쏟는다. 바로 이 지점이 효율과 동떨어져 있는데 이를 탈숙련화라고 납작하게 말하기는 뭇 세계의 시선일 뿐이다. 회화의 통속적 판단과 관습이 자리하는 법칙의 외부에서 그는 이중 예외라는 운신의 폭을 얻는다. 진단에 의해 예외(disorder)에 놓였던 작가는 다시 한번 자신의 선택에 의해 예외(disorder)에 선다. 이 이중의 예외가 벌어지는 외연은 상이하지만 이로부터 얻은 운신의 폭이 그에게 발휘하는 힘은 값지다.
Within Spectrum
이장우의 선택과 발현의 특이점으로 보이는 작품에 드러나는 스펙트럼의 중층에 대한 단서는 바다 그림에서 촉발되었다. 회화를 감상할 때에는 작가가 설정한 적정 거리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데 대체로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로 설정하는 1.2미터에서 3.6미터 정도의 거리선을 두고 필요에 따라 더 근접하거나 더 물러서서 작품을 바라보곤 한다. 일반적으로 작가 또한 작업 과정에 화면에서 물러서서 자신의 작품을 관조하는 과정을 반복하는데 그 물러섬의 정도가 관객에게도 요구하는 적정 거리에 가깝다. 안목 해변과 경포 호수 일대를 그린 작품을 마주하면서 이장우가 설정한 거리는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화면 가까이에서 관찰한 건물의 세부를 1미터 물러나서, 또 3-4미터 물러나서 바라보면서 간취하게 되는 바는 물러섬에 따라 원경에서 얻게 되는 퍼스펙티브를 위해 형태가 와해되는 시각적 효과로의 전이가 여기서는 단순히 벌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쉽게 협상하지 않고 있다. 효율이나 효과를 위한 임의적인 처리의 위계를 부러 부리지 않는다. 바다는 바다로, 해안에 자리한 인간사의 인공물들은 그 인공의 존재만큼, 하늘은 하늘로, 풍경의 대상은 서로에게 양보 없이 자체의 세를 발휘한다. 양보는 미덕이지만 미덕보다 더 자연스러운 건 그대로 두는 것일지 모른다. 이 담백한 진실에도 불구하고 역능의 필터를 부여하여 위계가 개입된 예술은 대단히 인간적이다. 인간적이라 위대하지만 인간적이라서 자의적이다. 다시 이장우의 작품을 바라보면 추출보다 거기에 둠이 자연스럽다. 그에게 평창동은 부촌이 아니라 그가 간 곳, 그에게 롯데월드타워는 한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아닌 그가 바라볼 때 그 앞에 있던 건물이다. 스펙터클을 위한 포석이 없는 회화이기에 이장우의 작품에서 겪는 감동과 아름다움은 예술이 저 멀리 있다고 믿는 이들보다 예술이 도처하다고 믿는 이들에 가까이 있다.
이장우가 자연스러운 것은 화면의 수직적 구축이나 대상과 풍경 사이의 위계만이 아니라 눈과 대상 사이의 문제도 포함한다. 우리는 흔히 스펙트럼(spectrum)이 넓고 다양하기를 바란다. 혹은 한 지점에서의 심도가 깊기를 바란다. ‘spect’로부터 파생된 어휘가 일반적으로 ‘보기’와 연동됨을 떠올려 본다면 스펙트럼은 시각과 관점의 다양함과 유연함에 닿아 있다. 그러나 유령을 뜻하는 스펙터 (영: specter, 불: spectre)도 ‘spect’로부터 파생되어 우리가 쉽게 믿는 본 것과 보기의 행위가 환영에 근거함을 깨닫게 한다. 이토록 본다는 행위는 우리가 굳게 믿는 것과 그 믿음의 토양이 허약하다는 진실 모두를 일깨운다. 상징이 지배적이라고 믿는 세계관에 대항하여 상상의 힘을 복권하 려는 인류학자 모리스 고들리에는 20세기 대표적인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관계를 관련된 요소의 사이(between)에서 찾으려고 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관계는 사이(between) 만이 아니라 사이 내(within)에 자리한다고 주장한다. 스펙트럼이 빛의 반사와 흡수 사이의 계수로 표준화될 때 이 표준화가 수식하거나 형용하지 못하는 사이 내의 문제는 상상의 지대에서 다룰 문제이다. 이장우는 과녁을 향해 총을 드는 사수처럼 그리지 않는다. 그가 드는 붓과 나이프, 도구도 필요없이 캔버스로 향한 물감은 그리기의 목적보다 그리기의 정념과 기쁨에 봉사한다. 스펙트럼이 누군가에게는 질환 징후의 전(全)범위와 같은, 측정 범위를 말할 때 이장우는 결과적인 지표에서 벗어나 세계의 사이 내를 궁리한다.
숨 쉬는 공기, 세계를 채우는 대기, 대기의 시각적 효과인 구름과 바람, 그 많은 자연스러운 것들이 이장우에게는 자연스러워서 쉬운 것들이 아니다. 자연스럽다고 소홀히 하지 않는, 하나 하나가 그와 회화 사이 내에서 문제이고 문제적이다. 간결히 말하자면 민주적인데, 흔히 얘기하는 민주적임의 외양보다 태도에 있어서 더 그렇다.
Beyond Autism
이탈로 칼비노는 단편소설 「색깔없는 시대」에서 대기권이 형성되는 그 즈음의 세계에 대해 그린다. 단조롭지만 아늑하다고 느꼈던 세계에서는 개념이 많지 않아서 나와 너가 다름을 분리해서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대기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회색 너머의 세계에는 진홍빛 양귀비꽃, 피어나는 완두콩 색깔의 녹색 평원, 바다, 언덕, 들판 이 생기고 나와 너를 견주어 분리해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이 찬연한 세계의 이름들이 벅차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중립성이 깨져버린 부조화의 세계가 불편하여 이 세계로 나오기를 거부한다.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 짧은 소설에서 남은 자는 누구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숨은 자일까 남겨진 자일까. 그러다가 그리움이 있는 자가 한 뼘 정도는 낫겠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자폐는 어떤 세계일까 가늠해 보지만 사실 쉽게 가닿지 못한다. 그러나 그 진단에도 이장우가 닫힌 세계에 있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다. 그가 안내하는 세계가 눈앞에 있고 그가 낸 길이 여기 있는데. 그는 바람이 있고 그래서 그리는 이다. 그러므로 그는 내게 작가로 오롯하고 그에게 붙는 수식어는 오늘 참 옅고 한없이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