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아름다움의 부활
허태수 문화커뮤니티 금토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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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 K 부국장에게 이끌려 강릉의 이장우 스튜디오를 찾던 그 무렵 나는 존 듀이(John Dewey)의 『경험으로의 예술(Art as Experience)』을 읽고 있었다. 다들 아시는 것처럼, 리처드 슈스터만(Richard Shusterman)과 더불어 듀이는 프라그마티즘(pragmatism) 미학의 주창자다. 예술 혹은 미술이라는 게 오로지 그 분야를 공부해서 전문적으로 작업된 결과물에만 붙여지는 이름은 아니며, 개개인의 내적 경험과 그 표현을 통해 실천되는 것이라 했다. 따라서 프라그마티즘은 순수미술의 영역을 넘어서서 일상에 스며들어 있는 미적 경험과 삶을 밀접하게 통합하게 한다.
이장우 작가의 그림은 만족스러울 정도로 고양되고, 강렬하며, 유의미하고 정감적인 경험이다. 잘 느끼고 즐길 수 있는 미적 경험의 대상이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변기’나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세제 상자’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게 왜 미학이 되고 예술이 될까? 생생하고 감동적이고 공유되는 경험 때문이 아닌가!
그의 그림에선 ‘울지 말고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라’ 했던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가 소환된다. 살아있는 그림이라서 그렇다. ‘살아있음’이란 이 세상의 충돌이나 모순과 부딪혀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통해 해결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미적 경험은 정점에 도달한다. 이런 ‘살아있는’ 아름다움의 부활이 이장우의 그림이다.
이장우 작가의 그림은 만족스러울 정도로 고양되고, 강렬하며, 유의미하고 정감적인 경험이다. 잘 느끼고 즐길 수 있는 미적 경험의 대상이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변기’나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세제 상자’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게 왜 미학이 되고 예술이 될까? 생생하고 감동적이고 공유되는 경험 때문이 아닌가!
그의 그림에선 ‘울지 말고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라’ 했던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가 소환된다. 살아있는 그림이라서 그렇다. ‘살아있음’이란 이 세상의 충돌이나 모순과 부딪혀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통해 해결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미적 경험은 정점에 도달한다. 이런 ‘살아있는’ 아름다움의 부활이 이장우의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