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관계하는 어떤 풍경들
민병직_독립기획
본문
한라산, 성산일출봉, 산방산, 비자림, 광치기 해변, 새별오름 등 이제는 제법 친숙해진 제주의 풍경이 전시 공간 가득 펼쳐진다. 여기에 더해 우리의 산하, 일상 곳곳을 형형색색으로 수놓았던 개나리, 들꽃, 노랑붓꽃, 보라붓꽃, 장미, 튤립, 양귀비 등이 선명한 자태들로 자리하고 있다. 그렇게 익숙하기도 할 저곳의 풍경, 이미지들이 문득, 생경하고 낯선 느낌들도 전하기도 하지만 못내, 지금 여기의 오롯한 존재감들로 마주하도록 한다. 전체적으로 안정적인 구도를 바탕으로 분명한 형과 태를 이루고 있지만 세부 표현들이 전하는 힘과 기운들, 세(勢)도 만만치 않다. 친근한 풍경들이지만 갖가지 색의 물감들로 화면 안팎을 겹겹이 쌓아올려 빚어낸 풍부한 감각들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질료적이고 촉각적인 면모들, 때로는 부조처럼 입체감을 넘나드는 형상적인 면모들이 도드라지기도 한다. 이렇게 작가의 작업은 한 화면 속에 서로 다른 시선, 이질적인 힘들이 긴장감을 이루며 부단히 교차하는 것만 같다. 멀리, 어렴풋하면서도 분명하게 낯익은 모습들을 이루는 이미지, 풍경이 있는가 하면, 가까이 살아있는 것만 같은 격정적인 감각, 질료들의 움틀거림이 공존하는 식이다. 비슷한 느낌으로, 차분하고 조용한 풍경들인 것 같지만 왁자지껄한 작가의 수다스러움도 전해지는 것만 같다. 정적이지만 동적인, 그렇게 서로 대극적인 감각들이 묘한 상관관계를 이루며 반복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이었을까, 우리가 익히 아는 풍경들을 그렸지만 왠지 남다른 자태들로 다가오는 것 같기도 하고, 계절의 온기를 담은 모습들임에도 때로는 쓸쓸하고 날 것 같은 느낌들조차 전해지는 것만 같다.
이러한 다기한 느낌들에는 작가의 화법이나 일정한 작업방식도 한 몫 하지 않았나 싶다. 작가 역시 작업을 위해 세상 곳곳을 다니며 마주하고 경험한 풍경, 이미지들을 화폭으로 옮겨낸다. 그리고 풍경을 그리는 지금 시대의 여느 작가들이 그런 것처럼 세상의 모습을 카메라로 기록하고 이들 대상 이미지를 기반으로 작업하는데 이와 관련한 전공으로 인해 이러한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다각적인 활용에 능숙한 편이다. 이를 기반으로 그곳이 어디든, 직접적인 체험을 기반으로 하여 작가에 의해 선택된, 혹은 스스로 그리기를 원해 편집한 풍경만을 대상으로 작업을 이어간다. 객관적인 세상의 이미지이지만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는 작가 특유의 풍경이 만들어지는 기본적인 맥락이다. 그 대상이 자연이건 도시이건, 계획한 곳이든 우연하게 경험한 곳이 든 상관없이 작가의 온전한 관심에 의해 선별된 곳, 감각 이미지들만을 작업 대상으로 삼아 유화 특유의 질감이 살아나도록 하는 이른바 임파스토(impasto) 기법을 주로 사용하면서 다채로운 풍경들을 정성껏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눈으로 만지는 것만 같은 촉각적이고 질료적인 느낌들이 어느 정도 이러한 기법, 방식들에서 기인하는 것도 있 겠지만 온전히 그림 속으로 집중하여 매 순간 공들여 어루만지는 눈과 손의 밀도 있는 작가적인 태도들과도 무관하지 않나 싶다. 천천히 미세하거나 빠르고 거침없이, 거칠거나 매끄럽게, 멀거나 가깝게, 복합적이고 자유로운 이러한 서로 다른 표현방식들을 교차시키는 숱한 시선의 움직임과 익숙한 손놀림을 통해 세상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내밀하고 리드미컬하게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그림만을 향해 바쳐진 무수한 행위들의 반복, 축적들 속에서 작가 특유의 풍경들, 공간들이 살아난다. 단순히 세상을 그림으로 옮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본인만의 체험, 방식, 감각들로 세상과 마주하여 소통, 교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은 그렇게 작가가 세상과 관계하는, 매 순간 본인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마주하고 살아가는 각별한 것들, 삶의 많은 주요한 것들을 이루는 의미 충만한 것들이 아닐까 싶다. 어떻게 보면 이조차도 특별한 것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알려진 것처럼 세상과의 관계에 있어 다소 불편한 작가의 상황을 고려해보면 중요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면모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맥락에서 작가의 그림을 단순히 유아(唯我)적이고 본능적인 감각의 산물로만으로도 볼 수도 없는데 세상을 이미 정합적이고 체계적인 구도로 담아낸 사진적 이미지를 기반으로 삼고 있고, 이들 대상 이미지들조차도 작가의 직접적인 체험, 감각적 사유에 의해 선별, 구성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방식들마저도 작가만의 고유한 것은 아니겠지만 작가 역시 지금 시대의 다른 작가들이 그런 것처럼 그것이 디지털 테크놀로지이건 아날로그한 감성이건 상관없이 동시대적이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세상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고 이를 기반으로 작가만의 고유하고 인상적인 작업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얼마간 참고되어야 할 사항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이렇게 서로 상충하는 시선과 표현 방식들을 부단히 반복하면서 그 모든 요소들 이 살아있도록 하는 독특한 화면을 구성했는지도 모르겠다. 앞서 말한 작가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시선, 감각들의 배치가 공존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하게 이들 작업의 기술적인 방식과 과정들, 그리고 이를 통한 작가의 그림들이 세상을 담아내는 일정한 수단, 방편들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닌 세상과의 관계들을 형성하는 작가적인 삶의 소중한 일환이며, 삶 그 자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작가의 풍경, 작업은 작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감각적으로 구현한 객관적인 대상, 세계만이 아니라 그 속에서 작가의 주관적인 삶이 이루어지는 곳으로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세상 속에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하는, 그렇게 세상에 속하도록 하는 것들인 것이다. 그리고 역으로 그러한 세상 속에서 작가적인 삶을 형성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결국 작가의 그림은 스스로 의 삶으로 화한 세상이자 그 안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것들이라는 면에서 작가의 작업, 풍경은 결국 서로가 서로를 관계하면서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중국의 석도가 『화어록(畵語錄)』에서 말한 바 있는 ‘산천은 나에게서 다시 태어나고 나는 산천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구절을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작업은 시선 앞에 자리하는 객관, 대상만도 아니며 눈과 손의 작가적인 주관의 차원으로만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이에 자리하여 양자를 얽히도록 하여 작가만의 세상을 새롭게 펼치도록 하는 것들, 작가의 삶을 세상에 근본적으로 연루시키도록 관계하는 것에 가깝지 않나 싶다. 단순한 공간적인 풍경만이 아니라 작가가 그 안에서 무수한 교감, 소통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시간적인 풍경 이며 작가가 그곳에서 기억하고 느꼈던 장소의 차원만이 아니라 이곳으로 다시 소환하여 새로운 감각, 사유로 마주하여 살아가도록 하는 세상과의 관계의 차원으로도 자리한다. 작가에게 있어, 그리고 우리에게도 풍경은 이처럼 세상과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일이자, 그렇게 외부적인 대상을 마주하여 끊임없이 내밀한 사유, 감각들로 전환시키는 사건일 것이다. 같은 모습일지라도 풍경이 시시각각 상황에 따라 매번 그 느낌들을 달리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작가의 경우 이러한 면모가 특히 명료하고 풍부한 색채감들로 표현되곤 하는데, 눈, 혹은 손으로 만지는 것 같은 촉각적이고 질료적인 작업의 전체적인 형상들을 더욱 강화시키는 요인들이기도 하다. 그렇게 풍경은 작가에는 물론이려니와 저 너른 세상 속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을 다르고 새롭게 확장시킨다. 삶의 끊임없는 활력을 얻게 되는 근원으로 자리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작가가 전하는 풍경에서 우리가 받게 되는 간단치 않은 감성들이자 미덕들이기도 할 것이다. 끊임없이 펼쳐지는 세상을 부단한 새로움으로 마주하도록 하고 그렇게 매번 다른 열려진 확장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다. 작가의 경우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풍경, 작업을 통해 세상과의 관계를 돈독하고 자유로운 것으로 부단히 새롭게 엮어가고 있는 작가의 경우 그 강도와 진폭이 사뭇 달랐기에 더욱 감각적인 몸짓들로 다가왔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속뜻까지 미처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존재론적인 작가의 삶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진정성 있는 의미의 풍경들로 말이다.
이러한 다기한 느낌들에는 작가의 화법이나 일정한 작업방식도 한 몫 하지 않았나 싶다. 작가 역시 작업을 위해 세상 곳곳을 다니며 마주하고 경험한 풍경, 이미지들을 화폭으로 옮겨낸다. 그리고 풍경을 그리는 지금 시대의 여느 작가들이 그런 것처럼 세상의 모습을 카메라로 기록하고 이들 대상 이미지를 기반으로 작업하는데 이와 관련한 전공으로 인해 이러한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다각적인 활용에 능숙한 편이다. 이를 기반으로 그곳이 어디든, 직접적인 체험을 기반으로 하여 작가에 의해 선택된, 혹은 스스로 그리기를 원해 편집한 풍경만을 대상으로 작업을 이어간다. 객관적인 세상의 이미지이지만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는 작가 특유의 풍경이 만들어지는 기본적인 맥락이다. 그 대상이 자연이건 도시이건, 계획한 곳이든 우연하게 경험한 곳이 든 상관없이 작가의 온전한 관심에 의해 선별된 곳, 감각 이미지들만을 작업 대상으로 삼아 유화 특유의 질감이 살아나도록 하는 이른바 임파스토(impasto) 기법을 주로 사용하면서 다채로운 풍경들을 정성껏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눈으로 만지는 것만 같은 촉각적이고 질료적인 느낌들이 어느 정도 이러한 기법, 방식들에서 기인하는 것도 있 겠지만 온전히 그림 속으로 집중하여 매 순간 공들여 어루만지는 눈과 손의 밀도 있는 작가적인 태도들과도 무관하지 않나 싶다. 천천히 미세하거나 빠르고 거침없이, 거칠거나 매끄럽게, 멀거나 가깝게, 복합적이고 자유로운 이러한 서로 다른 표현방식들을 교차시키는 숱한 시선의 움직임과 익숙한 손놀림을 통해 세상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내밀하고 리드미컬하게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그림만을 향해 바쳐진 무수한 행위들의 반복, 축적들 속에서 작가 특유의 풍경들, 공간들이 살아난다. 단순히 세상을 그림으로 옮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본인만의 체험, 방식, 감각들로 세상과 마주하여 소통, 교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은 그렇게 작가가 세상과 관계하는, 매 순간 본인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마주하고 살아가는 각별한 것들, 삶의 많은 주요한 것들을 이루는 의미 충만한 것들이 아닐까 싶다. 어떻게 보면 이조차도 특별한 것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알려진 것처럼 세상과의 관계에 있어 다소 불편한 작가의 상황을 고려해보면 중요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면모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맥락에서 작가의 그림을 단순히 유아(唯我)적이고 본능적인 감각의 산물로만으로도 볼 수도 없는데 세상을 이미 정합적이고 체계적인 구도로 담아낸 사진적 이미지를 기반으로 삼고 있고, 이들 대상 이미지들조차도 작가의 직접적인 체험, 감각적 사유에 의해 선별, 구성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방식들마저도 작가만의 고유한 것은 아니겠지만 작가 역시 지금 시대의 다른 작가들이 그런 것처럼 그것이 디지털 테크놀로지이건 아날로그한 감성이건 상관없이 동시대적이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세상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고 이를 기반으로 작가만의 고유하고 인상적인 작업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얼마간 참고되어야 할 사항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이렇게 서로 상충하는 시선과 표현 방식들을 부단히 반복하면서 그 모든 요소들 이 살아있도록 하는 독특한 화면을 구성했는지도 모르겠다. 앞서 말한 작가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시선, 감각들의 배치가 공존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하게 이들 작업의 기술적인 방식과 과정들, 그리고 이를 통한 작가의 그림들이 세상을 담아내는 일정한 수단, 방편들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닌 세상과의 관계들을 형성하는 작가적인 삶의 소중한 일환이며, 삶 그 자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작가의 풍경, 작업은 작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감각적으로 구현한 객관적인 대상, 세계만이 아니라 그 속에서 작가의 주관적인 삶이 이루어지는 곳으로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세상 속에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하는, 그렇게 세상에 속하도록 하는 것들인 것이다. 그리고 역으로 그러한 세상 속에서 작가적인 삶을 형성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결국 작가의 그림은 스스로 의 삶으로 화한 세상이자 그 안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것들이라는 면에서 작가의 작업, 풍경은 결국 서로가 서로를 관계하면서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중국의 석도가 『화어록(畵語錄)』에서 말한 바 있는 ‘산천은 나에게서 다시 태어나고 나는 산천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구절을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작업은 시선 앞에 자리하는 객관, 대상만도 아니며 눈과 손의 작가적인 주관의 차원으로만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이에 자리하여 양자를 얽히도록 하여 작가만의 세상을 새롭게 펼치도록 하는 것들, 작가의 삶을 세상에 근본적으로 연루시키도록 관계하는 것에 가깝지 않나 싶다. 단순한 공간적인 풍경만이 아니라 작가가 그 안에서 무수한 교감, 소통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시간적인 풍경 이며 작가가 그곳에서 기억하고 느꼈던 장소의 차원만이 아니라 이곳으로 다시 소환하여 새로운 감각, 사유로 마주하여 살아가도록 하는 세상과의 관계의 차원으로도 자리한다. 작가에게 있어, 그리고 우리에게도 풍경은 이처럼 세상과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일이자, 그렇게 외부적인 대상을 마주하여 끊임없이 내밀한 사유, 감각들로 전환시키는 사건일 것이다. 같은 모습일지라도 풍경이 시시각각 상황에 따라 매번 그 느낌들을 달리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작가의 경우 이러한 면모가 특히 명료하고 풍부한 색채감들로 표현되곤 하는데, 눈, 혹은 손으로 만지는 것 같은 촉각적이고 질료적인 작업의 전체적인 형상들을 더욱 강화시키는 요인들이기도 하다. 그렇게 풍경은 작가에는 물론이려니와 저 너른 세상 속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을 다르고 새롭게 확장시킨다. 삶의 끊임없는 활력을 얻게 되는 근원으로 자리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작가가 전하는 풍경에서 우리가 받게 되는 간단치 않은 감성들이자 미덕들이기도 할 것이다. 끊임없이 펼쳐지는 세상을 부단한 새로움으로 마주하도록 하고 그렇게 매번 다른 열려진 확장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다. 작가의 경우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풍경, 작업을 통해 세상과의 관계를 돈독하고 자유로운 것으로 부단히 새롭게 엮어가고 있는 작가의 경우 그 강도와 진폭이 사뭇 달랐기에 더욱 감각적인 몸짓들로 다가왔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속뜻까지 미처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존재론적인 작가의 삶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진정성 있는 의미의 풍경들로 말이다.